늦가을 마트 한편에서 단단하고 둥근 호박 하나를 보자, 발길이 멈췄습니다.
짙은 주황빛 껍질을 가진 그 호박을 바라보다 문득,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호박죽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향기 속에 스며 있던 오래된 가을의 기억들이 스르르 되살아났습니다.
마당 한켠의 호박 넝쿨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해마다 호박 넝쿨이 자라났습니다.
어머니는 봄이면 마당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호박씨를 심으셨지요.
“호박은 참 고마운 작물이야.
한 번 심어두면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지.”
그 말씀처럼, 호박은 특별한 손길 없이도 여름 내내 넝쿨을 뻗으며 자라났습니다.
조그맣게 고개를 내밀던 호박이 어느새 두 손으로도 감싸기 힘들 만큼 커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가 어린 나에겐 신기한 일상이었습니다.
따뜻한 부엌, 그리고 호박죽
첫 서리가 내리면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호박을 따서 집 안으로 들이셨습니다.
무쇠솥에 호박을 넣고 은근한 불로 천천히 끓이던 날의 부엌은, 말 그대로 ‘따뜻함’ 그 자체였습니다.
호박을 반으로 가르고, 속을 파내고, 껍질을 벗기는 소리.
그리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까지—그 모든 소리가 집 안 구석구석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호박죽 다 됐다, 얼른 와서 먹어라!”
어머니의 부름에 식구들이 모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박죽이 그릇에 담겨 나왔습니다.
한 숟갈 떠 넣는 순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마음까지 따뜻해졌지요.
아픈 날의 위로
몸살이 나서 기운 없던 날이면, 어머니는 꼭 호박죽을 끓여주셨습니다.
“호박은 속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운도 나게 해.
얼른 먹고 힘내라.”
그 말 한마디와 함께 건네시던 따끈한 죽 한 그릇은
무슨 약보다도 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온기와 위로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끓이는 호박죽
이제는 내가 어머니께 배운 그대로 호박죽을 끓이기도 합니다.
마트에서 고른 둥근 호박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기고 큼직하게 썰어 냄비에 넣습니다.
예전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요즘,
이런 천천히 끓이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더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가끔은 어머니께 직접 호박죽을 끓여 드릴 때도 있습니다.
“넌 손맛이 점점 나를 닮아간다”는 말씀에,
조용히 웃음이 납니다.
호박이 알려준 삶의 지혜
호박을 보고 있으면 삶의 어떤 진실이 떠오릅니다.
눈에 띄진 않아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천천히 익어가는 것.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달콤해지고, 깊어지는 것.
어머니도 그러셨고, 나도 이제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겠지요.
가을, 그리움과 온기의 계절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마트 진열대 위, 다양한 크기의 호박들을 보며 문득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속엔 계절의 향기뿐 아니라, 어머니와 나누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니까요.
오늘 저녁엔 다시 한 번 호박죽을 끓여보려 합니다.
이번엔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호박죽 한 그릇에 담긴 건 단순한 영양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과 정성, 그리고 가족의 사랑과 계절의 온기까지—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음식입니다.
늦가을 저녁, 여러분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 호박죽 한 그릇 나눠보세요.
작은 한입 속에서, 잊고 지낸 그리움과 따뜻함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