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면, 문득 할머니 댁 마당 한편에 매달려 있던 메주가 생각납니다. 갈색으로 단단하게 굳은 메주들이 새끼줄에 매달려 흔들리던 모습, 그리고 그 메주에서 나던 특유의 구수한 냄새까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작은 메주 덩어리 하나가 우리 밥상의 근본이자, 한국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보물이라는 것을.
1. 메주, 그 소박한 시작
메주는 참으로 소박합니다. 콩을 삶아 으깨고, 네모반듯하게 빚어 띄우고, 말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과정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메주를 만드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입동이 지나고 첫 추위가 올 때, 그때가 바로 메주 쑤는 때였어요. 너무 일찍 만들면 벌레가 생기고, 너무 늦으면 제대로 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죠. 자연의 리듬을 따라 살던 그 시절, 사람들은 계절과 함께 호흡했습니다.
2. 할머니의 정성 어린 손길
할머니는 메주를 만드실 때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콩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이었어요. "이런 콩은 안 돼"라며 하나하나 골라내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콩을 삶으실 때면, 집 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퍼졌죠. 그리고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주는 정성이야. 성의 없이 만들면 맛이 없어."
콩을 으깰 때도, 모양을 빚을 때도, 그리고 마당에 내다 널 때도 늘 정성을 강조하셨어요. 어린 마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정성이야말로 한국 음식의 핵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3. 기다림의 미학
메주를 만든 후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한 달, 두 달... 메주가 자연스럽게 발효되고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죠. 요즘처럼 급하게 뭔가를 원하는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로움입니다.
그 기다림 동안 메주는 변합니다. 처음엔 누렇던 색깔이 점점 갈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짙은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표면에는 하얀 곰팡이가 피어나기도 하고, 간혹 비가 오면 축축해지기도 했어요.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메주도 살아있는 거야. 숨을 쉬고 변해가는 거지."
4. 된장과 간장의 탄생
이듬해 봄이 되면, 드디어 메주가 빛을 발할 때가 옵니다. 장독대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어 장을 담그는 것이죠. 이때부터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며칠, 몇 주를 기다리면 간장이 우러나오고, 메주 찌꺼기는 된장이 됩니다.
할머니의 된장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된장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맛이 있었어요. 구수하면서도 짭짤하고, 뒷맛은 달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한 그릇이면,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았죠.
5. 사라져가는 풍경, 남아있는 가르침
이제 메주를 직접 만드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 메주를 매달 수도 없고, 설령 마당이 있는 집이라 해도 그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마트에서 된장과 간장을 사면 되니까요.
그래서 더욱 그리워집니다.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겨울 마당의 풍경이, 그리고 그 메주에 담긴 할머니의 정성과 시간이. 메주 하나에는 단순히 콩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정서, 그리고 느림의 미학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6. 메주가 전하는 삶의 지혜
메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좋은 것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자연의 리듬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성과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변화에 대해서 말이죠.
요즘에도 간혹 시골 할머니들이 만든 된장을 맛볼 기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새삼 놀라게 되죠. 이 깊은 맛이 어떻게 콩과 소금, 그리고 시간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 빠른 세상에서도 메주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무엇인가를 성급하게 얻으려 하기보다는, 때로는 천천히 기다리며 자연스러운 변화를 지켜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맛을 아는 길이 아닐까요?
겨울이 오면, 다시 한 번 메주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남겨주신 그 소중한 가르침을, 오늘도 조용히 새기며 살아갑니다.